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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준 : total 17 posts
2008/09/11 내 스무 살에게 - 이응준 (8)
2008/07/31 가설극장 (6)
2007/08/25 바다 곁에서 (6)
2007/07/13 애수의 소야곡 (6)
2007/06/15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18)

| 내 스무 살에게 - 이응준  [나의 서재]

당신 아니어도 그 마음 잘 압니다. 당신이었을 적에 그 마음 전혀 모르던 것과 같이.
긴 시간이 흘렀건만 나는 여전히 외롭습니다.
반짝이는 쇠붙이 따위를 물어다가
제 둥지로 옮기는 까마귀들의 어두운 습성처럼

잘 기억나지 않는, 작고 빛나는 그 시절의 물건들을 되찾아
당신의 낮잠 든 머리맡에 가만히 내려놓고 싶습니다.

– 이응준,「내 스무 살에게」,『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세계사, 2002
2008/09/11 21:39 2008/09/1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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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moth on 2008/09/1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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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설극장  [길 위의 이야기]

그는 무심결에 속으로 되뇌기 시작한다. 방어 작전의 목적. 하나 공세 이전의 여건 확보, 둘 적 부대 격멸, 셋 중요 지역 확보, 넷 시간 획득. 방어 작전의 준칙… 하긴 뭐가 됐든 상관있으랴. 화생방 교본을 외었다면 MOPP 4단계를 되뇌고 있었을 터. 어느 것 하나 잊은 것은 없었다. 다만, 어슴푸레 떠오르는 지난 맥락과의 배치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비열한 거리》의 찰리 마냥 갓 뿜어져 나와 비산된 탄피를 집어든다. 누군가의 피와 살, 그 영원 같은 삶을 한순간에 관류하고도 남을 만질 수 없는 불길의 찰나. 무정한 짐승은 탄착군 없는 휑한 재사격 표적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구겨진 담배를 피워 물며 잠복해 있던 역린들을 태워 나간다. 예비 전력은 열사에 소모되어 쓰러지고, 이윽고 뒤늦은 작달비가 천막을 두들긴다. 모두가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감옥 안에서 열쇠를 쥐고 갇혀 있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동원훈련. 마지막 날이 심술을 부리며 희끗희끗 지나가고 있었다.

2008/07/31 05:04 2008/07/31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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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moth on 2008/07/31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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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곁에서  [길 위의 이야기]

오래된 계선주 너머 희뿌옇게 안개가 가려온다. 그 미명 앞으로 우두커니 먼산바라기를 하는 노부의 모습이 보인다. 이른 첫차와 뒤늦은 유람으로 식어버린 감상 속으로 나직이 한 마리 백구가 날아든다. 목선의 뱃머리를 휘감고, 이내 달무리 속으로 젖어드는 설익은 전령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왜. 여기서. 당신인지를.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노부의 구성지고 흐무러진 가락 사이로 순간 “법광 스님이 선물로 준 부채가 말을 걸어온다. ‘내가 너에게 선물이 되었듯이 너도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라.’” 여드레간의 다스름 같았던 나날이 미혹과 비의와 기만의 현시 앞으로 풀리지 않는 실타래로 다가와 안광을 흐려지게 한다. 이제는 그저 다가가 함께 표류하리라 다짐한다. 바다 곁에서 너를 듣는다. 바다 곁에서… “그녀는 언제라도, 언제라도 떠나길 원한다면 그럴 수 있지, 괜찮은 생각이야. 그녀는 삶이 흘러가 버리는 것을 느낄 때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어. 그리고 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면 다시는 현실에 빠져버리지 않을 거야…”

2007/08/25 19:01 2007/08/2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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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moth on 2007/08/2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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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수의 소야곡  [길 위의 이야기]

어딘가에 묶여 있음을 비로소 실감할 때가 있다. 24인용 천막 한 귀퉁이 붙어 있던 명패와 적절히 분배된 편제 하에 생경한 보직 옆의 내 이름을 본 그날도 그러했으리라. 포병부대 인사과에서 민사대대 치안반으로. 추억 속으로 흩어진 이들은 거대한 망상조직 하에 그렇게 다시 모여, 금세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친 잠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선배님 좌상탄입니다. 빗소리는 폭음과 화음을 맞춰서 간헐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차박차박, 텅텅. 두발만이 표적지를 비켜갔다. 쉼 없이 아니 느슨하게 이어지는 식사와 잠, 교육들.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난 한 귀순용사의 강연, "모더니티가 튼실하게 현존재들의 삶을 틀어쥐고 있는 지금", 그가 말하는 "이 시대의 스펙터클"이 귓가를 잠시나마 공명케 했다. 한명의 아저씨와 한명의 동창을 만났고, 반권의 소설책과 두갑반의 담배를 피워냈다. 그리고는 PT 사이로 스며든 유우머 폴더의 헛헛한 플래시처럼, 나직이 전쟁의 상흔을 가리는 재건부대의 윤색화를 보며 세 번째 동원훈련을 마쳤다. 그래 여기까지만.


"너는 알아? 몰라? 모르지. 나도 모른다. 그치만 이건 알겠어. 너 때문은 아니라는 거. 그건 남희도 마찬가지지. 우리가 그랬다면 그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내 사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니까 병신 짓 그만 하고, 더는 머뭇거리지 말고, 기다리지 말고, 얼른 와라. 우리가 밥 먹듯이 하는 낙법이란 게 뭐냐. 팔 한쪽을 부러뜨리는 대신 목숨을 구하는 거 아니냐." 1

이 문장이 한 주 내내 나를 채근하고 있다. 애먼 사소취대 얘기는 물론 아닐진대, 《황색눈물》에서 에이스케가 말하는 교훈조의 성장통에 대한 긍정보다도, 《미스 리틀 선샤인》 의 프랭크의 경구보다도 한없이 포근한 위로로 다가왔다.

그 진득한 울림 속에서 안심하고 있었지만, 빗소리에 잦아드는 어둠 속에서 다가온 외마디 정권에 하릴없이 스러진 채로 허울좋게 방기했었던 이들을 복기할 수밖에 없었다. 차박차박, 텅텅.

"먼 훗날 나는 사랑했던 그녀가 아니라, 그게 사랑이었음을 겨우 깨닫고 쓸쓸해하는 나를 추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통이 염주알처럼 단단해진 밤, 나는 달에 엎드려 흐느낀다." 2


맨 처음

맨 처음 고양이를 향해 나비라고 불렀던
그 사람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을 거야.

나는 너무 오래 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에게
이렇게 속삭여.

나비야—
나비야—

붉은 지붕에 오르렴.
올라
흐르는 흰 구름을 보렴.

어서 날아가라,
내 나비야.

– 이응준, 「맨 처음」, 『애인』, 민음사, 2012


Footnote.
  1. 이응준,「애수의 소야곡」,『약혼』, 문학동네, 2006, 93쪽. [Back]
  2. 이응준,「인형이 불탄 자리」,『약혼』, 문학동네, 2006, 235쪽. [Back]
2007/07/13 02:22 2007/07/13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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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moth on 2007/07/13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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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길 위의 이야기]

그는 인던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옅은 피로감이 몰려왔고, 두 시간에 걸친 고투 속에 잠복해온 금단 증세가 찾아왔다. 이것으로 끝이군요. 언젠가 빛나는 어떤 자리에서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요. 명멸을 지속하는 모니터 너머 칼림도어 타나리스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할까요? 광활하게 이어지는 끝없는 사막, 그 지평선 위에 단둘이 남은 형색이 흡사 무협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마지막 남은 담배를 오전 중에 피어버렸음을 깨달았을 때, 나직한 메시지 알림음이 다시금 나를 환기시켰다. 어느 소설 속 동화 얘기처럼, 멀어져가는 모습을 누군가 가장 오래 지켜볼 수 있는 이 지평선에서 헤어지는 거에요. 저 멀리 휘적거리며 날아가는 그리핀을 바라보며 고결의 오라 속에서 잠시 명상에 빠져있는 그를 바라봤다. 그는 목마른 소금 사막을 적시는 한줄기 뜨거운 비 같은 식어버린 맥주를 들이켜고 있을 터였다. 고달픈 새벽잠 속으로 사그라질 그를 향해 목울대까지 차올랐던 애틋한 송사를 남기려 했을 때 그가 말했다. 열렙하셔서 얼른 말 타세요.
2007/06/15 03:07 2007/06/15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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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moth on 2007/06/15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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