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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lunam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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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신문 기사를 빌리자면 현대 세계의 두 가지 주된 문제는 컴퓨터 의 침투와 제 3 세계의 괄목할 만한 팽창이다. 옳은 얘기다 .

최근에 짧은 일정으로 외국여행을 다녀왔다. 하루는 스톡홀름에 묵었고 나머지 사흘은 런던에서 지냈다. 스톡홀름에 들렀을 때 잠시 틈이 나길래 시장에 들러 훈제 연어를 한 마리 샀다. 덩치가 엄청나게 큰 놈인데 값은 거저나 다름없었다. 연어를플라스틱으로 잘 포장하면서 상인이 말했다.

" 보아하니 여행중인 모양인데 이놈을 늘 냉동 상태로 잘 보관해야 할거요. "

그래? 좋다, 한번 노력해 보자.

기분 좋게도 런던의 출판업자가 예약해 둔 호텔은 별 다섯 개짜리 였다. 그 호텔은 객실 마다 미니 바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호텔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마치 의화단 사건 당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베이징에 체류하는 외 국인 사절단의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투숙객이 한뎃잠을 자고 있었다. 온통 짐가방을 쌓아 둔 틈바구니에서 담요를 두르고 잠을 청하는 기색이었다.

호텔 직원은 말레이시아 사람 몇 명에다가 나머지는 모두 인디언이었는데,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인지 물었다. 대답인즉슨, 바로 전날에 이 웅대한 호텔에다가 컴퓨터 시설을 했다는 것이었다. 결함을 모두 체크해서 제거하려면 시간이 더 걸려야 하는데 그만 두 시간전에 컴퓨터 시설이 완전히 고장나고 말았단다. 사정이 이러니 어떤 방이 비었고 어떤 방이 찼는지 알아낼 길이 없다는 얘기였다.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 무렵에 컴퓨터 시설이 원상으로 복구되었고, 가까스로 내 방을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되었다. 행여 연여가 상할까 봐 걱정되어서 일단 가방을 열고 그놈을 꺼내 들고 미니 바가 어디 있는지 방안을 휘이 둘러보았다.

대체로 호텔에서는 소형 냉장고가 미니 바를 대신한다. 냉장고 속에는 맥주 두 병과 독주 가 든 미니어처 술병 몇 개, 과일 주스 캔 서너 개, 땅콩 봉지 두 개가 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 날 내가 들어간 호텔 방의 냉장고는 대형의 가정용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위스키와 진, 드람비, 쿠르보아지에 따위가 50 병, 페리에가 큰 걸로 여덟 병, 비텔로아제 두 병, 에비앙 두 병, 반 병짜리 샴페인 세 개, 기네스 흑맥주, 에일 맥주, 네덜란드 맥주, 독일 맥주, 프랑스 제와 이탈리아 제 백포도주 병이 보였다. 땅콩과 칵테일 크래커, 아몬드, 초콜릿 따위도 들어 있었다.

도저히 연어를 집어 넣을 공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널찍한 조리대 서랍 두 개를 열어 냉장고에 든 물건들을 그리로 옮겼다. 냉장고에는 연어를 집어 넣었다. 손을 탁탁 털고 연어 문제는 그쯤에서 잊어버 렸다.

다음날 외출했다가 오후 4시에 호텔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연어가 식탁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냉장고는 다시 온 갖 고급 술과 과자 따위로 꽉 들어차 있었다. 서랍을 열자 전날 내가 그 곳에 넣어 둔 물건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접수계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냉장고 속이 비었더라도 그건 내가 내용물을 다 먹어서가 아니라 연어를 보관하기 위해서이니 그리 알도록 객실 담당에게 전하라고 당부했다.

접수계원의 답변은 이러했다. 손님에게 받은 주문은 일단 중앙 컴퓨터에 입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좀더 골치 아픈 문제인 데, 직원들 은 하나같이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말로는 어떤 지시도 전달할 수 없다. 전달 사항이 있으면 무조건 대화형 프로그래밍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그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서랍 두 개를 열어 냉장고를 새로 채웠던 물건들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냉장고에 다시 연어를 집어 넣었다.

다음날 오후 4시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연어는 다시 식탁위에 놓여 있었고 이미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냉장고는 다시 크기가 다른 온갖 병으로 가득 채워졌다. 네 개의 조리대 서랍은 금주법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의 무허가 술집의 밀실을 연상시켰다.

접수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컴퓨터에 한층 심각한 문제가 생 기는 통에 자신도 죽을 맛이라고 대꾸해 왔다. 객실 담당을 호출하자 뒤 꼭지에 말총머리를 매단 청년이 나타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그 청년이 할 줄 아는 말은 나도 모르는 방언 이었다. 나중에 가서 인류학을 전공한 동료한테 물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건 알렉산더 대왕이 록사나에게 구애하던 시기에 케피리스탄에서 통용되던 사투리였다.

다음날 아침에 계산서에 서명하고자 1층으로 내려갔다.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하고 반나절 사이에 내가 뵈클리쿠오를 수백 리터나 마시고 다양한 위스키를 10리터, 매우 희귀한 맥주 여러 병, 진 8 리터, 페리에와 에비앙, 산 펠레그리노 같은 미네랄 워터를 2.5 리터나 마신 걸로 되어있었다.

게다가 유니세프가 보호하는 어린이 전부를 괴혈병으로부터 지켜주기에 충분한 양의 과일 주스, 아무리 비위가 좋은 사람도 구토를 할 정도로 많은 아몬드와 호두, 땅콩을 먹어 치웠다고 적혀있었다. 해명 하기 위해 애썼지만 직원은 음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컴퓨터에 그렇 게 나와 있으니까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말하자 아보카도 (열대 아메리카산 녹나무과 과일)를 한 알 가져다 주었다.

현재 내 출판업자는 몹시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이다. 틀림없이 나를 상습적으로 공짜를 밝히는 인간으로 여길 것이다. 연어는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리집 애들은 내가 주량을 좀 줄여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1986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여러 해 전에 자신이 동성 연애자라는 걸 숨기지 않는 어떤 TV 배우가 노골적으로 한 청년을 유혹하려고 애쓰며 이렇게 말했다. "여자하고 교제한다고? 여자하고 교제하면 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걸 모르는군?" 밀라노의 텔레비전 방송국 주변에서는 여전히 그 문장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농담은 이미 때가 지났다는 느낌이다.

최근에 마트레 교수가 폭로한 연구에 따르자면 이성간의 성적 접촉은 발암성이 있다고 한다. 나로서는 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다. 이성간의 성적 접촉은 죽음을 부른다. 바보 천치조차 다 아는 바이지만, 이성끼리 성적으로 접촉하면 아이가 태어난다. 더 많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죽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난다.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고려가 불충분한 AIDS 공포증 정신 이상 자들은 오직 동성애 행위만을 구속하겠노라고 으르렁거린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성애 행위도 마찬가지로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한다. 동성 연애자이건 이성 연애자이건 모두가 같은 입장이 될 것이다.

과도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러나 성적 접촉보다 위험도가 아주 높은 다른 범주가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연극 비평가, 지성인, 야심만만한 정치가들 뉴욕의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오프 브로드웨이보다 더 전위적인 연극을 하는 곳)극장에는 가지 말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발음상의 이유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은 유난히 침을 많이 튀긴다. 불빛에 비친 배우들의 옆모습을 유심히 지며보면 곧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게다가 실험적인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의 경우에는 관객들이 무대 쪽으로 바짝 다가앉기 때문에 모두가 얼굴에 배우의 침이 튀길 만한 사정권에 들어간다.

고위 공무원일 경우에는 마피아와 거래하지 말아라. 그랬다가는 대부의 손에 입을 맞추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탈리아 비밀 결사 단체인 카모라와 관계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피를 나누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카톨릭 활동 단체에 가입하는 걸 통해 정치적 활동을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성찬식에는 참석하지 말 것. 사제의 손가락을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병원균이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 비밀 참회를 할 경우의 위험성 역시 말하나마나이다. 일반시민 기름에 오염된 바다에서 수영을 하면 감염 위험성이 높아진다. 기름 방울은 오염된 물을 마셨다가 내뱉은 다른 사람의 침을 당신의 입으로 전달한다.

하루에 담배를 80개피 이상 태우는 사람은 다른 물건을 만졌던 손으로 담배 필터 부위를 만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병원균이 호흡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써라. 해고당하면 온종일 손톱을 씹으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탈리아 사르디니아 섬의 양치기나 테러리스트들한테 납치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납치범들은 대체로 수많은 사람을 납치하면서 똑같은 머리 씌우개를 쓴다. 플로렌스와 볼로냐 사이를 이동할 때에는 기차를 이용하지 말라. 좁은 터널 속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해 폭발 사고가 생길 경우에 유기물질을 함유한 돌 조각이 빠른 속도로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제대로 돌보기 어렵다.

핵 폭격을 당하기 쉬운 지역에는 가까이 가지 말라.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는 순가, "아니, 이럴 수가!" 하고 외치면서 본능적으로 (씻지 않은) 손을 입으로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 십자가 예수상에 입을 맞추며 죽어 가는 사람,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재사용하기 전에 기요틴의 칼날을 제대로 소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들은 병균에 전염 될 가능성이 어느 경우보다 높다. 또한 수용소의 고아들도 위험하다. 수용소에서는 못된 수녀들이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한테 침대에 다리가 묶인 상태에서 바닥을 혀로 핥는 벌을 준다. 소수 인종과 제3세계 거주민들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전염병에 걸릴 위험성이 매우 높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긴 담뱃대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걸 통해서 인디언은 멸족에 가까운 위기를 맞고 말았다. 중동 지방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낙타가 혀로 핥을 가능성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이란과 이라크의 사망률이 높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고문당하는 사람은 고문 기술자가 얼굴에 침을 뱉을 경우에 전염될 우려가 매우 높다. 캄보디아 인과 레바논 캠프 거주자들은 피의 목욕blod bath(대학살이라는 뜻)을 피하는 게 좋다.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의 의사가 이를 반대할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들은 백인들이 경멸하는 눈초리를 던지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침을 뱉는 일을 벌이는 한 온갖 다양한 질병에 감염될 우려가 높다.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정치범들은 주의해야 한다. 경찰이 심문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잇몸을 후려친 손등으로 바로 자신의 잇몸 위를 때리려 하면 얻어맞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라. 풍토병과 기근이 잦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배고픔의 고통을 물리치고자 자주 침을 삼켜서는 곤란하다. 주의의 불결한 공기와 접촉했던 침이 장을 오염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관계 당국과 언론은 조만간에 해결을 보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 건전하지 못한 표제를 붙인 인쇄물을 만들어 내는 대신에, 위에서 제시한 위생에 대한 지침을 홍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85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여러분이 포르노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여기에서 말하는 포르노는 다소 에로틱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 즉 역겨움을 느꼈던 사람이 많을 걸로 알고 있지만 어쨌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같은 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진짜배기 포르노, 시종일관 관객의 욕정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 하나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얘기이다. 이런 영화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교접이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의 욕정을 자극할 뿐,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상 볼 게 없다.

치안 판사들은 종종 포르노인지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영화인지를 판정 내리는 일에 동원된다. 내가 보기에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부류는 아니다. 때때로 진짜배기 예술 작품이 예술적인 가치가 덜 한 작품에 비해서 한결 위험한 경우를 보아왔다. 작품에 따라서 신앙이나 행동 방식, 당대의 사회 풍조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이다. 나는 법적으로 동성 연애가 허용되는 21세 이상의 남자는 포르노를 즐길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달리 볼 만한 게 없을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때때로 법정이 한 작품을 놓고 (기존의 도덕관을 공격하는 장면을 담고 있을지라도) 어떤 관념이나 미학적인 이상을 표현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작품인지, 아니면 오로지 관객의 본능을 자극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작품인지를 판정 내려야 할 경우가 있음을 인정한다.

포르노 영화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 있다. 이 기준은 영화 속에서 별 내용 없이 늘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기초를 둔다. 전세계적으로 호평 받은 걸작 「역마차(stagecoach)」는 도입부와 중간중간, 그리고 끝 부분은 예외지만 전체적으로 역마차 위에서 줄거리가 진행된다. 그런데 이런 역마차 여행이 없다면 이 영화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안토니오니의 「모험」은 순전히 낭비되는 시간만으로 짜여진 작품이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가고 잡담을 나누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장면의 연속인데 특별한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이런 식의 시간 낭비는 관객의 입장에서 즐길 만한 대상일 수도 잇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 시간 낭비이다.

이와 달리 포르노 영화는 입장권과 비디오 테이프를 판매할 구실로 사람들이 성교하는 장면, 남자와 여자가,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여자와 개나 숫말(남자가 암말이나 암캐와 성교하는 포르노 영화는 왜 없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이 교접하는 장면을 보여주겠노라고 선언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업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그런 영화는 중간에 일없이 허비되는 시간이 엄청나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보자. 길버트라는 사내가 길버티나를 강간하기 위해서 링컨 센터로부터 쉐리단 광장으로 가야 한다고 할 때, 그 영화는 길버트가 차를 타고 일일이 신호등 신호를 받으면서 이동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보여 준다. 포르노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 득실거린다. 차에 올라서 먼 거리를 생각 없이 이동하는 사람, 호텔 접수대 앞에서 서명을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는 커플,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가기까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신사, 서로에게 자신은 돈주앙보다 사포를 더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기에 앞서 온갖 술을 천천히 홀짝거리며 마시거나 레이스와 블라우스를 하염없이 만지적거리는 처녀들. 포르노 영화에서 거친 대로 간략하고 힘이 넘치는 성교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교통국에서 후워금을 내도 됨직한 다큐멘터리를 꾹 참고 봐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는 다 그럴 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길버트가 시종일관 길버티나를 정면과 뒤쪽과 옆쪽으로 강간하는 장면만을 보여 주는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무리가 있다. 배우들의 입장에서는 육체적으로 무리가 따르고 제작자로서는 경비가 많이 든다. 게다가 관객들 역시 정신적인 측면에서 교접 장면만 연속되는 영화는 견뎌 내기 힘들 것이다. 강간이라는 위법 행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정상적인 배경 속에서 연기가 행해져야 한다. 어떤 예술가의 경우에서 정상적인 상태를 묘사한다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자연히 포르노 영화는 일탈 행위가 흥미를 끌게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모든 관객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정상 상태를 표현해야 한다. 따라서 만일 길버트가 버스를 타고 A에서 B지점으로 갈 경우, 관객들은 그가 버스를 잡아타고 뒤이어 버스가 A에서 B지점을 향해 이동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종종 이런 장면은 관객들을 짜증나게 만든다. 입에 담기 어려운 끔찍한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끔찍한 장면만 이어진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일없이 허비하는 장면이 이어진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일없이 허비하는 장면이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한 번 얘기하겠다. 영화가 들어가라. 만일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갈 경우에 등장 인물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낭비한다면, 지금 당신이 보는 영화는 포르노 영화이다.

1989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휴대폰 사용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당신 자유이다. 그러나 그 조롱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다음 다섯 가지 부류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 부류는 장애자들이다. 이들은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 하더라도 의사나 응급 구조대와 언제라도 연락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휴대폰이라는 구원의 도구를 그들에게 제공한 과학 기술은 찬사를 받을 만하다.

두 번째로는 직업상의 막중한 책무 때문에 어떠한 긴급 사태에도 즉각 대응해야 하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소방서장, 시골 의사, 갓 죽은 사람의 장기를 기다리는 이식 전문의 등). 이들에게 휴대폰은 싫어도 지니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다.

세 번째 부류는 내연(內緣)의 커플이다. 이들에게 휴대폰의 등장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마침내 가족이나 비서나 심술궂은 동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연의 파트너와 은밀하게 통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전화 번호를 그녀와 그(또는 그와 그, 그녀와 그녀일 수도 있다. 이밖의 다른 결합이 가능한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두 사람만 알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위에서 말한 세 부류의 사람들은 비난을 받거나 조롱을 당할 이유가 없다. 앞의 두 부류로 말하자면, 설령 그들이 레스토랑이나 영화관이나 장례식장에서 전화를 받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용납한다. 내연 관계에 있는 남녀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대개 아주 조심스럽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다.1)

그런데 다음 두 부류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이 위험한(남보다 자기 자신들에게 더 위험한) 자들이다. 우선, 방금 헤어진 친족이나 친구와 하찮은 화제를 놓고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조건에서는 어디에 간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없고 그 시간에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또 만일 그들이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철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자기들의 공허함을 깃발처럼 흔들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를 성가시게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내면이 얼마나 삭막한가를 이해하고 우리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점에 감사하면서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우리 자신이 그들과 닮지 않았다 해서 악마적인 기쁨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그건 오만과 무자비함의 소치일 수도 있다). 그들을 우리의 고통받는 이웃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우리의 한 쪽 귀를 시끄럽게 하거든 다른 쪽 귀도 마저 내밀도록 하자. 마지막 부류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단히 복잡하고 지극히 긴급한 업무 때문에 자기들에게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온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사회 계층의 밑바닥에 있는 가짜 휴대폰 구입자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기차 안이나 공항이나 레스토랑에서 우리의 귀를 따갑게 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면, 그 내용은 대개 미묘한 금전 거래나 납품되지 않은 금속 형재(型材), 재고품 넥타이에 대한 할인 요구 따위와 관련된 것들이다. 전화를 하는 당사자가 생각하기에는 한결같이 록펠러 같은 사업가들이 나눌 만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상류층 행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 구분이라는 것은 아주 잔인한 메커니즘이다.

졸부(猝富)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하더라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무산 계급의 촌티를 쉽사리 벗어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생선용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할 줄도 모르며, 자기의 페라리 뒷유리창에 원숭이 인형을 매달아 둘 것이고, 전용 제트기의 계기판에는 성(聖) 크리스토포로2)의 조각상을 올려 놓을 것이다. 또 모국어인 이탈리아 어를 하면서 <매니지먼트> 같은 영어 단어를 서툰 발음으로 섞어 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게르망트3) 공작 부인 같은 고상한 사람들에게서는 절대로 초대를 받지 못한다(그는 다리만큼이나 긴 요트를 가지고 있는 자기 같은 사람이 왜 초대를 받지 못하는지 모르겠다며 속을 끓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작 록펠러 같은 사업가에게는 휴대폰 따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록펠러 같은 사람은 대규모의 유능한 비서진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자기 할아버지가 임종을 맞고 있다는 소식 같은 것도 운전사가 와서 귓속말로 전해 준다. 진짜 힘있는 사람은 걸려 오는 전화를 일일이 받지 않는다.

늘 회의중이라서 전화를 직접 받을 수 없는 자, 그가 바로 힘있는 자이다. 경영진의 말석이라도 차지한 사람에게는 성공의 두 가지 상징인 개인 화장실 열쇠와 <이사님은 지금 회의중이십니다>라고 대답하는 여비서가 있게 마련이다. 이렇듯 휴대폰을 권력의 상징으로 과시하는 자는 오히려 자기가 말단 사원의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만인 앞에서 고백하는 셈이다. 한창 섹스를 하고 있다가도 상사가 부르면 차려 자세를 취해야 하고, 먹고 살기 위해 밤낮으로 채권자들을 쫓아다녀야 하며, 딸아이가 처음으로 영성체 성사를 받는 날 예금 잔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은행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처량한 신세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휴대폰을 보란 듯이 남들 앞에서 사용하는 것은 위와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자기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1991년



1) 프랑스 어판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이런 주석이 붙어 있다. <나는 휴대폰을 사용해도 좋은 사람들의 범주에서 내연의 커플을 삭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오늘날엔 어떤 남편이나 아내가 휴대폰을 산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그들이 혼외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 어린 예수를 업고(Christo-phoros) 개울을 건넜다는 기독교의 전설적인 인물 크리스토포로(영어로는 크리스토퍼, 프랑스 어로는 크리스토프)는 전통적으로 여행자들의 수호자였으나 오늘날엔 자동차 운전자들을 지켜 주는 성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3)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귀부인.


시작하는 방법, 끝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내게는 연극 같은 추억이 하나 있다. 장학금을 받고 투린 대학에서 초빙 연구원으로 활동을 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 시절에 대해서는 더없이 행복한 추억이 있는 반면에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는 참치에 대한 역겨운 기억도 있다. 그 대학의 식당은 식사 때 정확하게 한 시간 반 동안만 음식을 제공했다. 식사시간이 시작된 후로 30분 안에는 그 날의 특선 요리를 먹을 수 있으며, 그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참치를 먹어야 한다. 당시에 나는 여름 방학 때와 일요일을 제외하고 4년에 걸쳐서 참치로 만든 음식을 1천 9백 20끼나 먹었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드라마는 그게 아니다. 학생 신분인 까닭에 우리는 가진 돈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화나 음악, 연극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대단했다. 그래서 10분 일찍 극장에 도착해 어떤 신사에게 접근하곤 했다(그의 공식 직함이 뭐였더라?) 박수 부대의 대장인 그 신사와 악수를 나눈 뒤에 그의 손에 1백 리라를 쥐어 주었다. 그러면 그는 우리를 자신이 이끄는 패거리에 끼워 주었다. 우리는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지불하는 박수 부대원이었다.

자정이 되면 무정하게도 대학 문이 닫혔다. 그 시간까지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밖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꼭 기숙사에서 자야 하는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학생은 장장 한 달까지 기숙사를 비워도 무방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사정을 고려할 때 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정 10분전에는 극장 문을 나서야 한다는 걸 뜻했다. 서둘러서 목적지로 달려가야 했다. 그러나 자정 10분전에도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결과 4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시공을 초월한 걸작 연극 작품들을 관람했으면서도 마지막 10분은 마저 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최근까지 오이디프스가 결국 그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작가를 찾아가는 여섯 등장 인물은 연극 말미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오스왈드 알빙은 페니실린의 도움으로 결국 회복이 되었는지, 햄릿은 결국 사는 쪽이 죽는 쪽보다 낫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물론이었다. 여전히 나는 진짜 시그노라 폰자가 누구인지 몰랐으며, 루게로 루게리/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셨는지, 오셀로가 두 번째 밀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이고에게 일격을 가했는지, 상상력이 풍부한 병자가 건강을 해복했는지,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국 결혼에 성공했는지, 과연 누가 번베리인지 알지 못했다.

이런 식의 무지로 인해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 파올로 파브리를 만나서 지난날을 추억하는 일이 생겼다. 그 자리레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친구 역시 비슷한 고뇌에 시달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경우하고는 상황이 앞뒤가 바뀌기는 했지만 말이다. 학창 시절에 그는 학생들이 조직해서 운영하던 극장에서 일했다. 그가 맡은 일은 문 앞에 서서 표를 받는 것이었으므로 그 친구로서는 제 2 장이 시작되기 전에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뒤늦게 극장에 들어간 친구는 눈이 먼 채로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은 품에 코델리아의 시체를 안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쩌다가 그런 소름끼치는 난국에 처하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친구는 불랑쉐 뒤보아가 이방인들에 대한 믿음을 천명하는 걸 보았다. 하지만 왜 그런 아리따운 여자가 정신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는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햄릿이 더없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자기 백부에 대해 왜 원한을 품게 되었는지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오셀로가 무시무시한 행동을 보여 주는 장면을 보았는데, 유순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어쩌다가 배게 위에서 배게 밑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늘어놓기로 하자면 한없이 긴 이야기지만 이쯤해서 간단히 줄이기로 하겠다. 파올로와 나는 서로의 비밀을 나누기로 했다. 둘 다 우리 앞에는 찬란한 노년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골집의 계단 앞쪽에 앉아서, 또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여러 해에 걸쳐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파올로는 끝부분을, 나는 앞부분을,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중간에 우리는 사건의 전조를 느끼거나 카타르시스를 맛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비명을 질러댈 것이다. "농담이겠지! 그가 뭐라고 그랬다고?" "어머니, 저는 태양을 손에 넣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니까!" "아하, 그렇게 해서 그의 신세가 엉망이 되고 만 거로구먼." "그랬어? 나중에 가서 무슨 불행한 일이 벌어졌던 거지?" 그가 내 귀에 대고 물음에 답한다. "저런, 대단한 가족이로구나! 이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이제 오이디프스 얘기 존 해봐!" "간단해. 엄마는 자살하고 오이디프스는 스스로 자기 눈을 멀게 만들지." "불쌍한 친구로구나. 하지만…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에게 진실을 일러주려고 애썼잖아."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는데? 어떻게 그는 그런 사실을 모를 수 있었던 거지?" "오이디프스 입장에서 생각해봐. 역병이 돌기 시작했지. 그때 그는 행복하게 결혼한 왕이었는데…" "그런데 자기 엄마하고 결혼하고서도 그 사실을 전혀…" "당연히 전혀 몰랐지! 그게 바로 작품 전체의 요점이야." "마치 프로이트의 개인사 같구만. 네가 오이디프스였더라도 사람들의 얘기를 사실대로 믿지 않았을 거야." 우리 두 사람은 이후에 지금보다 더한 행복감을 맛보게 될까?

그와 달리 이런 추정도 가능하다. 카드 게임의 경우에 이미 으뜸패가 나온 뒤에 입장해서 누가 게임을 이기고 지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현장을 떠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예술을 이런 현실 세계로서 경험하는 특권을 누리는 자들을 가슴 속에 늘 새로운 느낌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우리 두 사람이 계속해서 연극의 앞부분과 끝부분에 대한 정보를 나눌 경우에, 혹시 그런 풋풋함을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1988


아이스크림을 먹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또래의 어린이들은 두 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은빛 금속의 닫집을 갖춘 마차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으로, 하나는 2센트짜리 콘이었고 다른 하나는 4센트짜리 아이스크림 파이였다. 2센트짜리 콘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어린아이가 손으로 잡기에 딱 알맞았다. 아이스크림 상인은 크림 통에서 특이하게 생긴 스쿠프(아이스크림 뜨는 기구)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콘 속에 담아 이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할머니는 이 콘을 일부만 먹으라는 얘기를 빼놓지 않으셨다. 뾰죽한 손잡이 끝부분은 버리라는 얘기였다. 상인의 손이 닿은 부분이라는게 그 이유였다.(하지만 콘 중에서 그 부분이 가장 맛있었다. 바삭바삭하고 감미로운 맛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버리는 척하다가 할머니 몰래 먹었다.)

4센트짜리 파이 역시 특이하게 생긴 자그마한 기계로 만들었다. 이 기계도 색이 은빛이었다. 달콤한 비스킷 두 쪽을 원통 모양의 단면을 가진 아이스크림 단면에 대고 눌러서 이 파이를 만들었다. 혓바닥을 비스킷 사이의 틈 속으로 밀어 넣으면 곧 혀 끝에 아이스크림이 와 닿았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이후에 달콤한 음료수에 적신 것처럼 부드러운 비스킷을 먹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아이스크림 파이를 먹는 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론적으로 생각할 때 만드는 과정에서 파이와 접촉하는 것은 기계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상인은 그걸 손으로 집어서 건네주었다. 파이의 경우에는 손때에 오염된 부분을 잘라 낸다는 게 불가능했다.

내가 부러워한 건 4센트짜리 파이 두 개가 아니라 2센트짜리 콘 두 개를 사주는 부모를 둔 또래들이었다. 그들을 뭐에 홀린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특혜 받은 어린이들은 괜히 우쭐거리면서 양손에 콘을 하나씩 들고 돌아다녔다. 능숙한 솜씨로 머리를 좌우로 움직여가면서 한쪽 콘을 다 핥은 뒤에 다른 쪽 콘을 핥는 일을 되풀이했다. 눈이 튀어나올 만큼 부러운 의식이었다. 나도 그런 의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틈만 나면 집안 어른들에게 졸랐으나 괜한 헛수고였다. 어른들은 계속 완고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4센트짜리 하나라면 사주겠지만 2센트짜리 두 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학이나 경제학이나 식이 요법학 가운데 어떤 학문도 어른들의 거절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양쪽 콘의 손잡이 부분은 먹지 말고 버리는 게 좋다고 믿는 위생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양쪽 콘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다가는 정신이 없어져서 돌이나 계단, 길의 갈라진 틈에 발이 걸려 넘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뻔한 거짓말이었다. 무언가 지극히 교육적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어린 나로서는 그게 무언 지를 알아낼 능력이 없었다.

나 자신이 한 사람의 시민이자 소비 사회의 부절제와 낭비 문화(30년 전의 사회는 이렇지 않았다.)의 희생자로서,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집안 어른들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4센트짜리 파이 하나 대신에 2센트짜리 콘 두 개를 먹는다는 건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굳이 낭비라고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돌아가자면 이는 분명히 낭비에 속한다. 말하자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두 개의 아이스크림 콘을 먹고 싶어 그토록 열을 올렸던 것이다. 두 개의 아이스크림은 부절제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내 청을 거절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번에 두 개의 콘을 먹는 행위는 볼썽사나운 행위, 가난한 자들에 대한 모독이자 거짓된 특권과 부를 과시하는 행위였다. 버릇 없는 아이들이나 한꺼번에 두 개의 콘을 먹었다. 현실이 아니라 동화 속이었다면 피노키오처럼 당장에 벌을 받았으리라. 벼락 출세자들한테나 어울리는 그런 겉만 그럴듯하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를 부추기는 부모들, 그들은 <하고 싶으나 자신이 없다>는 이름의 바보 같은 극장 속에서 자녀를 키우는 거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자녀가 리미니의 해안에서 행상한테 산 가짜 구찌 가방을 들고 비행기 2등석을 타고 나타날 날을 예비하는 셈이었다.

오늘날의 세상은 소비 문화의 부추김 때문에 어른들마저 버릇없는 철부지처럼 행동하는 곳이다. 소비 문화는 그들에게 양적으로 더 많은 걸 선사하겠노라고 약속한다. 합성세제 상자 속에 든 손목시계에서 잡지와 더불어 플라스틱 봉투 속에 든 보너스 팔찌에 이르기까지. 어린 시절에 내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양손에 콘을 하나씩 든 양수잡이 대식가들의 부모처럼, 소비 문화는 더 많은 걸 주는 척하지만 실은 4센트를 받고 4센트의 가치를 가진 걸 줄뿐이다. 사람들은 자명종이 내장된 걸 뽐내는 새로운 라디오를 구입하고자 지금까지 사용해 온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밖에 내다 버린다. 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결함 때문에 이 새 라디오는 수명이 고작 1년을 넘지 못한다. 값이 저렴한 신형 자동차는 가죽 시트와 차내에서 조절할 수 있는 양면 거울, 장식 계기판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수명은 이름도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피아트 500에 미치지 못한다. 구형 피아트 500은 심지어 고장났을 경우에도 발로 냅다 한 대 걷어차면 다시 시동이 걸린다.

지난 시대의 도덕은 우리 모두를 스파르타 인(검소하고 엄격하기로 소문남)으로 만들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의 도덕은 우리들이 모두 시바리스 인(이탈리아 남부의 옛 도시인으로 사치와 방탕을 일삼는 무리를 뜻함)이 되기를 바란다.

1989


인터넷에서 섹스를 찾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초보적인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섹스와 관련된 것을 찾고자 할 때 대개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의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최신 <플레이메이트>의 전면 누드 사진을 클릭하여 한두 번 재미를 보고 나면 그 일을 그만둔다.

모니터 화면이 아무리 크고 해상도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간편하고 만족스럽기로 말하면 차라리 그 잡지들을 사서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초심자들의 주변에 기막힌 사진을 인터넷에서 가로챘노라고 떠벌리는 자가 언제나 한 명쯤은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순진한 초심자는 자기가 훌륭한 인터넷 <항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다시금 섹스 사냥을 시도하게 된다.

어느 날 밤, 은유에 관한 참고 문헌 목록과 하이퍼텍스트1) 이야기용(用) 프로그램들 및 어쩌다 인터넷에 올려진 {순수 이성 비판}의 영어 번역본 사이를 항해하다 지쳐서, 나는 그림 사냥에 나서기로 하고 웹 크롤러에 들어가 섹스 관련 사이트를 검색했다.

웹 크롤러는 2천 88개의 주소를 확인해 냈지만, 내게 제공된 것은 1백 개뿐이었다. 웹에 횡행하는 무질서가 자못 심한 터라 진짜 주소와 사기성이 농후한 가짜 주소를 구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매력적인 제목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쾌락의 정원>, <성인을 위한 X등급 사진>, <으으으음, 벌거벗은 여인들이여!>, <북반구의 섹스 여신들> 하는 식의 제목들이었다. 하나같이 내가 주문만 하면 아주 진한 포르노 사진을 보여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있었다. 나는 에멜무지로 이리저리 클릭을 하다가, 마침내 <크래머의 코너 에로티카>에 들어갔다. 거기로부터 다시 <베리 핫 링크스>에 접속할 수도 있고,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 및 <웹에 오른 베이브들>로 들어갈 수도 있게 되어 있다.

나는 먼저 <톱 모델>이라는 사이트를 열었다. 거기에는 예의 크래머라는 사람이 제공하는 사진과 정보가 들어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들의 별로 노출이 심하지 않은 사진과 그녀들의 신상에 관한 정보이다. 나는 신디 크로포드를 클릭해서 그녀에 관한 것을 모두 알아냈다. 거의 {기독교인의 간증}이라는 잡지에 나오는 고백을 읽은 느낌이다.

나는 속았다는 느낌에 화가 나서, 이번에는 <베리 핫 링크스>를 시도한다. 그러자 그것은 나를 <플레이보이>와 <서부 캐나다의 게이와 레즈비언의 잡지>라는 사이트로 이끈다(후자는 다짜고짜로 자기 사이트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음을 알려 온다). 하는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웹에 오른 베이브들>뿐이다. 그리로 들어가자 50여 베이브(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주로 <소녀>나 <아가씨>를 뜻하는 말)들의 주소가 나온다. 그 베이브들은 저마다 <촉엥 청> 같은 매혹적인 이름과 자기의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다. 옳거니! 이 인형들을 보러 가자. 뭔가를 확실하게 보여 줄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 포인터가 닿는 대로 제니퍼 아몬이라는 베이브를 클릭했다. 그녀의 홈페이지가 머리만 나온 사진 한 장과 함께 나타났다. 제니퍼 아몬은 음란한 여자가 아니었다. 음란하기는커녕 성적인 매력도 별로 없는 평범한 여자였다. 그녀는 오벌린 칼리지라는 아주 평온한 직장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음을 밝힌 다음 자기가 가진 전문 직업 자격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었다. 나아가서 그녀는 자기의 샴 고양이가 8월 15일 낮 12시 28분에 죽었음을 알려 주고, 만일 내가 UD를 통해서 그녀의 홈페이지에 들어왔다면 조 랑이라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라고 요구했다. 섹스는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이 제니퍼라는 여자는 자기의 직업적 성공을 위해 광고를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외로움을 덜기 위해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을 찾고 있는 거였다.

크래머라는 이 고약한 작자가 도대체 무슨 장난을 치고 있는 거지?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사이트로 돌아가서 그의 이력을 클릭하고 비밀을 알아낸다. 그의 나이는 28세. 보스톤 대학을 졸업하고 저지 시티의 한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 한가로운 시간에는 내가 본 것과 같은 <웹 페이지>들의 설계를 도와 주는 일을 한다. 그는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에로 관련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을 도와 주고 아름다운 여자들의 아주 정숙한 사진 몇 장을 제공한다. 그러고는 방문자들로 하여금 <아가씨>들을 만나도록 유도한다. 그 여자들은 논다니나 야한 계집들이 아니라 행실 바른 규수들이다.

나는 실망을 느끼며 1백 개의 섹스 관련 사이트를 소개하는 처음의 주소 목록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댄 모울딩이라는 사람의 사이트다. 그는 내게 이렇게 예고하고 있다. 만일 내가 젖가슴과 엉덩이와 여체의 다른 부위들 및 하이퍼포르노를 실컷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사이트에서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되리라고.

나는 즉시 그 사이트에 접속한다. 그러나 내가 마주친 것은 포르노 사진이 아니라, 나를 추잡한 색골 취급하면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훈계하는 메시지다. 댄 모울딩은 미국 서부 유타 주에 사는 엄격한 도덕주의자(십중팔구는 모르몬 교 신자)이다. 그는 나같이 인터넷을 통해 포르노를 퍼뜨리거나 찾는 사람들 때문에 정보망이 혼잡해진다면서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는 것으로 허두를 뗀다. 그러고는 애인은 물론이고 친구조차 없는 진짜 병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컴퓨터에서 섹스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꾸짖은 다음, 사랑하는 일가 친척이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 그러더니 만일 내 할머니가 이 사실을 아시면 심장 마비로 돌아가실 거라고 악담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신부나 목사나 라비를 찾아가 내 죄를 고백하라고 권고한 다음, 마지막으로 나 같은 사람이 정신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웹 사이트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포르노에 빠진 자들의 속죄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서비스가 있음을 알려 준다. www.stolaf.edu/people/bierlein/noxxx.html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다.

<다음의 E-mail 주소로 내게 연락하라. 그대처럼 내 그물에 걸려들 만큼 어리석은 자들, 한마디로 인생의 낙오자들이 내게 보내 온 편지들이 많이 있다. 그대에게 그 편지들을 보여 주고 싶다.> 새벽 세 시였다. 그날의 섹스 사냥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컴퓨터를 끄고 잠자리에 누웠다. 꿈에서 나는 양들과 아기 천사들과 유순한 일각수들을 보았다.

1995년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우리는 여러 가지 경우에 갖가지 이유로 거짓말을 한다. 선거 운동중에는 으레 거짓말이 남발된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종합하고 단순화하기 위해, 또는 일을 더욱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며, 때로는 악의를 품고 더러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바로 이 신념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가장 비극적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 처지에서 보면 실제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정보가 부족한 탓에 참이 아닌 것을 말할 뿐이다). 어쨌거나 거짓말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며, 그렇게 거짓말을 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면,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리워질 때가 더러는 있지 아니한가? 다행히도 지적인 작업에 종사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투명성과 솔직성을 향한 우리의 그 간절한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우리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 첫번째 부류는 우리가 이탈리아 말로 <귀여운 거짓말>이라고 부르는 것을 작성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짓말이란 의미론적으로 보면 하나의 아이러니가 되겠지만, 바로 모든 의약품의 포장에 동봉된 사용 설명서를 가리킨다(우리는 그것들이 일러주는 바가 얼마나 참된 것인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말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의약품 사용 설명서 작성자들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때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하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로지 자기가 아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어려서부터 터득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런 사람들이 작성한 설명서이기에, <투약을 금해야 할 환자>를 열거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문구를 흔히 접하게 된다. <이 약의 성분 중 어느 하나에 과민증이 있는 환자.> 달리 말해서, 만일 이 약을 먹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입에 게거품을 물고 뇌전도(腦電圖)의 오르내림이 잦아드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이 약의 투여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해야 할 것을 다 말하지 않는 것은 때로 거짓말의 근원이 된다. 그런 점을 잘 아는 터라 사용 설명서 작성자들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어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통계학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된 바에 따르면, 이 약은 다음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목마름증, 두통, 구토, 현기증, 관절증, 설사, 결막염, 홍반, 경련성 대장염, 신장통, 알츠하이머 병, 황열, 급성 복막염, 실어증, 백내장, 대상 포진, 노년의 여드름, 남성 환자의 생리, 크라우스 엘더만 증후군, 주그마1), 히스테론 프로테론2).

이제 소프트웨어의 도움말 작성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특히 사용자가 초심자이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경우, 해당 제품의 제작자가 제공하는 사용 안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선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를 그것을 찾아 책상 위로 옮겨다 줄 누비아 출신의 노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것이 이미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쪽이 하필 쪽 다음에 나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기가 십상이다.

프로그램 제작자와 상관없는 출판사들에서 펴내어 아주 비싼 값으로 파는 매뉴얼의 경우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책들은 독자를 모두 바보로 여기고 만든 듯, <시작> 버튼을 누르면 예전의 만년필로는 만들 수 없었던 예쁜 이미지들이 화면에 가득 펼쳐질 것임을 설명하느라고 무려 10쪽을 할애한 것이거나 쪽수가 8백에 달하고 색인에는 온갖 잡다한 것을 자세하게 나열해 놓았음에도 유독 당신이 찾는 항목만 빠져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니 결국 믿고 의지할 거라곤 도움말, 즉 대개 물음표 모양으로 되어 있는 아이콘을 마우스로 누를 때 나타나는 화면밖에 없다. 예컨대,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개체 삽입> 기능이 있다는 것을 해당 메뉴를 보고 알았다고 하자. 당신은 개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곳에 삽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게 없다. 도움말을 작동시키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타난다. <문서에 개체를 삽입하는 기능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도움말 작성자가 모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그런 의혹을 품는다면 나는 이렇게 그 도움말 작성자를 역성들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 그 기능은 정말로 설명된 바를 행한다라고. 다만 문제는 당신이 받은 그 대답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대략적으로 보아 당신의 질문에서 물음표만 제거한 꼴이라는 점에 있다.

도움말의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연결>이라는 기능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도움말을 참조하면 이런 대답이 나온다. <개체를 연결시켜 주는 기능입니다. ≪접속≫ 참조.> <접속> 기능이란 또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면, <연결 문서에 접속하는 기능입니다>라는 설명을 만나게 된다. <에러 125> 같은 유형의 긴급성을 띤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도 도움말은 대단히 유용하다.

도움말은 당신에게 이렇게 일러줄 것이다. 당신은 <에러125>를 범했으며, 작업을 계속하기 전에 그 에러를 제거해야 한다라고. 그런 도움말 작성자를 양성하자면 아주 어릴 적부터 특수한 학교에서 준비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의 명제를 꾸미면서 논리 훈련을 하는 학교에서 말이다. <모든 독신자는 독신자이다>, 또는 <에파미메니데스는 뜀박질을 하거나 뜀박질을 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은 동물이다>,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코르불리데스가 배중률(排中律)을 진술한다면, 코르불리데스는 배중률을 진술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등등.



1996년

1) 이것은 병명이 아니라 수사학 용어이다. 동사 하나를 무리하게 두 개의 주어 또는 목적어에 연결하거나 형용사 하나로 두 개의 명사를 억지로 수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2) 이것 역시 병명이 아니라 수사학 용어이다. 담화에 나타나는 두 요소의 논리적 순서를 뒤집어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텔레비전에서 동네의 바보를 알아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차이의 존중을 사회의 근간으로 삼기로 결정한 문명에서 희극은 어떤 상황을 맞고 있는가? 전통적으로 희극은 불구자나 소경, 말더듬이, 난쟁이, 뚱뚱보, 백치, 일탈자, 평판이 나쁜 직업, 열등 민족으로 간주된 겨레 등에 의지해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이 금기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엔 감히 무고한 천민이나 천덕꾸러기를 흉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리에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더 이상 의사들을 조롱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해서 의사들의 단체가 일제히 들고일어나 아우성을 칠 테니까 말이다.

<셔츠 입은 검둥이>1) 를 맛보는 것도 안 될 일이고, <폴란드 사람처럼 취해>2) 있는 <터키 사람 머리>3) 에게 <꼬마 검둥이>4) 말을 해서도 안 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텔레비전의 코미디는 풍자의 대상을 텔레비전의 다른 방송물들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방송사간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각각의 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의 풍자와 조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 방송 저 방송의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편집해서 다시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 유일하게 허용된 코미디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전통적으로 볼 때 대담하게 자기 스스로를 조롱할 수 있는 자들은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이므로,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는 것이 바야흐로 힘의 과시가 되어가는 판국이다. 그 결과 희극의 실행 여부가 계급을 가르는 새로운 장벽이 되었다. 즉 옛날에는 마음놓고 노예를 비웃는 데서 주인임이 인정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마치 노예들만이 주인을 조롱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드골의 코나 아녤리의 주름살이나 미테랑의 송곳니를 아무리 웃음거리로 만든다 해도, 놀림을 당하는 그들이 놀리는 자들보다 언제나 더 강한 쪽이 될 것임을 우리는 직감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희극은 성향 자체가 잔인하고 냉혹하다. 희극은 정말로 멍청한 백치를 원한다. 그를 조롱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의 치유할 수 없는 결함에 비추어 우리의 우월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결국 하나의 해결책이 필요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냈다. 동네의 백치를 희화(戱畵) 거리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반민주적인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다. 그렇다면, 그에게 발언권을 주고 생방송에 나가서 자기를 직접 소개하도록 권유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완전히 민주적이다.

실제의 마을에서처럼 예술적 표현의 매개물은 생략해도 된다. 사람들은 술주정뱅이를 흉내내는 배우를 보고 웃는 것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자에게 직접 술값을 내주고 그의 타락을 비웃는다. 성패는 판가름났다. 동네 백치의 남다른 특성 가운데 하나가 노출증 환자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들 자신의 노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네 백치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상기하면 결과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옛날 같으면 한창 위기를 겪고 있는 어떤 부부의 남우세스러운 반목을 제3자가 백일하에 폭로했을 경우 그 부부는 아마도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절이 변하여 부부가 자기들의 추잡한 싸움을 공공연하게 재현하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그런 특전을 간청하기에 이른 마당에, 도덕을 운위할 자 그 누가 있으랴!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이론적인 틀의 놀라운 전도(顚倒)를 목격하게 된다. 즉 무해한 얼간이를 조롱하던 희극적인 인물은 퇴장하고 자기의 박약성을 스스로 드러내며 아주 행복해 하는 정신 박약자를 직접 등장시켜 스타를 만든다. 누구도 불만이 없다. 바보는 자기를 드러내서 좋고, 방송사는 배우에게 보수를 지급할 필요 없이 쇼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좋고,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가학증을 충족시키면서 타인의 어리석음을 조롱할 수 있어서 좋다.

이제 우리의 텔레비전 화면에 부쩍 자주 등장하게 된 사람들은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벌리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문맹자,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남색쟁이>라고 부르면서 즐거워하는 동성 연애자, 초로에 접어들어서도 퇴색한 매력을 뽐내려 하는 도화살(桃花煞) 낀 여자, 음조가 맞지 않는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가수, <인간 잠재 의식의 순환 회귀적 소멸> 따위의 현학적인 주장을 늘어놓으며 유식한 티를 내는 여자, 오쟁이를 지고도 희희낙락하는 사내, 미치광이 학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천재, 자비로 책을 내는 작가, 다음날 그 일이 항간의 화제가 되리라는 생각에 행복해 하면서 뺨을 때리고 맞는 기자와 사회자 등이다.

동네의 백치가 매우 즐거워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면, 우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웃을 수 있다. 이제 바보를 비웃는 것은 다시금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 이른바 <정치적으로 반듯한>5) 태도가 되었다.



1992년

1) 식후 과일 직전에 먹는 단 음식의 하나로 초콜릿의 겉을 크림으로 덮은 것.

2) <폴란드 사람처럼 취하다>는 프랑스어 표현은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취한다는 뜻.

3) 끊임없이 타인의 비난과 조롱의 표적이 되는 사람을 뜻하는 프랑스어 표현.

4) 한정사와 굴절 어미 같은 문법적인 요소들이 빠지거나 잘못 사용되는 초보적이고 부정확한 프랑스 어.

5) 영어의 politically correct를 직역한 이 말은 차이를 열등함이나 배제의 이유로 느끼게 함으로써 타인에게 상처를 줄 염려가 있는 것을 일체 배격하고자 하는 주장과 행동을 일컬을 때 쓰인다.


수입이 많은 직업을 선택하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세상에는 매우 인기가 높고 수입이 아주 많은 직업들이 있다. 그런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 준비할 것이 무언지를 알아야 한다. 고속 도로 진입로를 가리키는 표지판들을 도시 지역에 설치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 표지판들은 도심과 고속 도로의 차량 정체를 해소하는 것을 그 기능으로 삼고 있다. 그 표지판들을 따라갔다가 녹초가 된 채 변두리 공장 지대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막다른 길에 들어서고 보면, 그 점을 이내 깨닫게 된다. 사실 표지판을 세워야 할 자리에 제대로 세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둔한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이런 곳에 세우려 할지도 모른다. 즉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힘든 여러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분기점 같은 곳, 따라서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길을 잃기 딱 알맞은 지점 말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표지판 세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표지판은 가야 할 길이 눈에 빤히 보이는 곳, 모든 운전자들이 직감으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곳에 세워야 한다. 운전자를 반대 방향으로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도시 계획, 심리학, 게임 이론 따위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야 한다.

매우 유망한 직업이 또 있다. 가정용 전기 제품이나 전자 제품에 첨부되는 사용 설명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이 설명서의 목적은 제품의 설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다. 컴퓨터를 살 때 따라오는 두꺼운 매뉴얼 같은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매뉴얼도 제품의 설치를 방해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수행하긴 하지만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드는 것이 흠이다.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은 약품의 사용 설명서이다. 약품은 우선 학술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이름은 약의 성격을 분명하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약을 사려는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프로스타탄prostatan>1), <메노파우진menopausine>2), <피아톨락스piattolax>3) 같은 이름의 약이 그러하다.

약품의 사용 설명서는 그와 달리 우리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경고문을 난해한 문장으로 작성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부작용 없음. 다만 어떤 성분에 대해서는 예기치 않은 치명적인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음.)

한편 가전 제품의 사용 설명서는 하나마나 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너무 뻔한 이야기다 싶어 건너뛰며 읽다 보면 진짜 필요한 정보를 놓치기가 십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라는 표시가 나타나 있는 부분입니다. 첫번째 시도에서 뚜껑이 열리지 않을 때는 다시 한번 시도하십시오. 상자가 열리면 안에 있는 알루미늄 뚜껑을 제거하기 전에 빨간 띠를 뜯어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용기가 파열됩니다. 주의! PZ40을 꺼낸 뒤에는 상자를 버리셔도 됩니다.>

괜찮은 직업을 또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여름에 시사 주간지나 교양 주간지에 실리는 심리 테스트를 입안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테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1.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1) 사리염4) 한 잔 2) 오래 묵은 코냑 한 잔

2. 다음 두 사람 중에서 누구와 휴가를 보내고 싶으십니까?

1) 나병에 걸린 팔순 노파 2) 이자벨 아자니5)

3.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1) 살을 따끔거리게 하는 불개미로 온몸이 뒤덮이는 것 2) 오르넬라 무티6)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

위의 질문에 대해서 모두 1)번을 고르셨다면, 당신은 기발한 착상을 잘 하고 발명의 재주가 있으며 독창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적으로는 약간의 불감증이 있는 것 같군요.

위의 질문에 대해서 모두 2)번을 고르셨다면, 당신은 악당입니다.

어떤 일간지의 건강 난에서 선탠에 관한 테스트를 본 적이 있다. 그 테스트는 모든 질문에 대해서 A, B, C 세 가지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A번에 나온 대답들이 걸작이다.

1. 햇볕에 노출되면 피부가 어느 정도로 빨개집니까?

A. 심하게

2.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일광욕을 하십니까?

A. 햇볕에 노출될 때마다

3. 홍반이 생긴 지 48시간이 지나면 피부가 어떤 색깔이 됩니까?

A. 아주 빨갛다

만일 여러 차례 A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의 피부는 극도로 예민하며 일광에 의한 홍반이 생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식의 테스트도 생각해 봄직하다.

1. 당신은 여러 번 창 밖으로 떨어진 적이 있습니까?

2. 만일 그렇다면, 그 때문에 여러 차례 골절을 경험했습니까?

3. 골절의 결과로 매번 영구적인 장애가 생겼습니까?

위 질문들에 대해서 만일 당신이 두 번 이상 <예>라고 답했다면, 당신은 바보이거나 청각에 장애가 있어서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아래쪽에서 장난치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어서 내려오라고 하거든, 창 밖을 내다보지 않도록 하십시오.



1991년

1) 이탈리아 어로 <프로스타타prostata>는 전립선이라는 뜻.

2) 이탈리아 어로 <메노파우자menopausa>는 폐경이라는 뜻.

3) 이탈리아 어로 <피아톨라piattola>는 사면발이라는 뜻.

4) 황산 마그네슘. 하제(下劑)로 쓰인다.

5) 영어판에는 이자벨 아자니 대신 데미 무어가 들어가 있다.

6) 이탈리아의 여배우(1956∼ ). 영어판에는 클라우디아 쉬퍼가 대신 들어가 있다.


사용 설명서를 따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이탈리아에서 카페의 설탕 그릇 때문에 수난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찻숟가락으로 설탕을 그릇에서 퍼내려는 순간, 뚜껑이 기요틴처럼 뚝 떨어져 내려서 숟가락을 떨어뜨리게 하고 주위에 설탕을 흩뿌리게 하는 그 고약한 설탕 그릇 때문에 말이다.

그럴 때 그런 물건을 발명한 자는 마땅히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수난을 겪은 사람들의 저주와는 반대로, 그 발명자는 천국과도 같은 아름다운 해변에서 자기 범죄의 달디단 열매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유머 작가 쉘리 버먼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 설탕 그릇을 발명한 자들은 머지않아 안쪽에서만 문이 열리는 대단히 안전한 자동차를 발명하게 될 거라고.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가지 면에서 성능이 아주 뛰어난 차를 운전해 왔다. 다만 한 가지 이 차는 재떨이가 운전자의 왼쪽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독자들도 인정하겠지만, 운전자는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은 변속 기어와 갖가지 조종 장치를 위해 비워 둔다. 따라서 운전을 하면서 흡연을 하는 경우에는―이건 아주 나쁜 습관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오른손으로 담배를 피게 마련이다.

그렇게 오른손으로 담배를 피운다고 할 때, 왼쪽 어깨의 왼쪽에 있는 재떨이에 재를 떠는 것은 일련의 복잡한 동작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도로에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만일 이 자동차가 시속 1백 8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다면, 잠시 한눈을 팔면서 재떨이에 재를 떠는 행위는 대형 트럭과의 항문 성교라는 죄악을 저지르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자는 진짜 살인 전문가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흡연에 기인한 암으로 죽게 하기보다는 외부 물체와의 충돌을 통해 장렬하게 죽을 수 있게 했다. 나는 문서 작성 소프트웨어에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다. 80만 리라에서 1백만 리라 정도를 주고 워드 프로세싱 프로그램을 하나 구입하면 디스켓과 매뉴얼과 보증서 등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받게 된다.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배우려면 제품을 만든 회사의 강사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매뉴얼을 참조하면 된다.

그런데 회사에서 파견하는 강사는 대개가 위에서 말한 설탕 그릇의 발명자로부터 교육을 받은 듯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를 향해 권총을 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 때문에 20년 정도의 징역형을 선고받게 되겠지만(변호사가 똑똑하다면 그보다 형기가 짧을 것이다), 그게 오히려 시간을 버는 길이다. 매뉴얼의 경우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을 참고하려고 펼쳐 드는 순간부터 골치가 아파질 테니까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어떤 종류의 프로그램을 위한 어떤 매뉴얼이든 차이가 없다. 프로그램의 매뉴얼은 대개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있는데, 그 모서리가 날카롭기 때문에 아이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 이 상자의 내용물을 어렵사리 꺼내 보면, 꽤나 두툼한 책자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마치 철근 콘크리트로 제본을 한 것처럼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고 너무 무거워서 거실에서 서재로 옮기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책자마다 제목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어느 걸 먼저 읽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가학 취미가 비교적 덜한 회사에서는 대개 두 권으로 된 매뉴얼을 제공하지만, 가장 변태적인 회사에서는 네 권짜리를 주기도 한다. 언뜻 보면 첫째 권은 초심자를 위해 내용을 차근차근 일러주는 책이고, 둘째 권은 숙련자를 가르치기 위한 책이며 셋째 권은 전문가용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세 권에는 각기 다른 내용이 실려 있다. 초보자로서 당장에 알아야 할 내용은 전문가를 위한 책자에 들어 있고, 전문가에게 필요한 정보는 초보자를 위한 책자에 들어 있다. 더군다나 향후 10년간 사용자가 매뉴얼의 내용을 늘려 갈 것이라고 예상한 듯, 3백 장 가량이나 되는 종이를 마음대로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루스리프 식으로 묶어 놓았다.

루스리프 식 서류철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렵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몇 차례 넘기다 보면 고리가 일그러져서 바인더가 터지고 종잇장이 온 방바닥에 흩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정보 찾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이른바 책이라고 물건을 다루는 데에 미립이 나 있다. 그런 책들 중에는 더러 단면에 색칠을 한다든가 반달 모양의 홈을 파서 원하는 정보를 즉시 찾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사전이나 전화 번호부처럼 말이다.

프로그램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런 아주 인간적인 관행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수명이 여덟 시간도 채 안 되는 한심한 책자들을 제공하는 것이리라. 이런 매뉴얼의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책자들을 해체해서 문헌학자의 지도를 받아 여섯 달 동안 연구한 뒤에 네 장의 파일 카드(네 장이면 충분하다)에 요약한 다음 원본을 폐기하는 것이다.

1985년


공공 도서관의 체계를 세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

1) 장서목록은 가능한 한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야 한다. 서책 목록을 정기간행물 목록에서 분리시키고, 정기간행물 목록을 목차나 사항색인 목록과 분리시키고 마찬가지로 새로 구입한 도서 목록과 이전부터 소장해온 도서 목록을 구분하려면 이만저만 애를 쓰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가능하면 두 책(신간도서와 이전부터 소장해온 도서)의 장서목록의 정서법을 달리해야 한다:가령 "Code" 라는 개념을 어떤 때는 C로, 다른 때는 K로, 또는 차이꼬프스키라는 고유명사를 신간도서일 경우는 C로 다른 때에는 Ch로, 또 다른 때는 Tch로 써야 한다.

2) 표제어는 사서가 결정해야 한다. 최근에 나온 미국 책들이 너무 뻐기고 있는 악습에 맞서기 위해 간행요목엔 책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시하는 일언반구도 하지 말아야 한다.

3) 기호는 도저히 정확히 옮겨쓸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수 많은 부호와 철자를 동원해 대출증을 쓸 때 마지막 부호를 쓸 자리가 없도록 하고, 그것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접수계원이 대출증을 불완전하게 기입했으니 다시 쓰라고 되돌려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신청과 대출 사이의 시간은 아주 길어야 한다.

5) 항상 한번에 한권씩 대출되어야 한다.

6) 대출증이 있어야만 책을 서가에서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열람실에서 책을 맘대로 내려 책의 삶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도록, 즉 한 부분은 집에 가서 일고 나머지 한 부분은 열람실에서 참조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흘끗흘끗 읽다가는 사팔뜨기가 되기 쉽상이기 때문에 잡깐씩 읽는 것은 금해야 한다.

7) 가능하면 어느 곳에도 복사기를 갖다 놓아서는 안된다. 그래도 한 대는 갖다 놓아야 한다면 쉽사리 사용할 수 없도록 엄격히 접근을 금해야 하며, 복사비 또한 근처의 복사점보다 비싸게 하고 복사량 또한 2-3페이지로 제한해야 한다.

8) 사서는 독자를 적으로, 게으름뱅이로(그렇지 않으면 일에 매달려 사는 사람으로), 그리고 잠재적인 도둑으로 여겨야 한다.

9) 거의 모든 직원이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참으로 미묘한 점을 건드리고 있는 셈인데, 결코 비꼴 생각은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모든 시민에게 노동능력과 안락함을 마련해 주는 것이 사회의 과제이며, 더 이상 인생의 청춘기에 있지 않거나 가진 힘을 완벽하게 쓸 수 없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예를 들어 소방서에서도 특수한 사람을 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대학도서관은 훨체어를 탄 장애자를 위한 경사면, 특수화장실을 마련하는 등 장애자들이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마련해 놓았다. 이 때문에 장애자들은 너무 일에 매달리다가 경사면으로 미끌어져 굴러떨어질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의 일부 업무는 사닥다리에 책을 싣고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하는 등 어느 정도의 힘과 숙련성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 나이나 다른 여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뭔가 의미있는 하길 원하는 모든 시민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도서관 사서자리도 여기에 해당되는데, 내 생각엔 도서관 사서는 은행의 회계원보다는 소방서원에 훨씬 가까우며, 곧 보게 되겠지만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몇가지 사항을 계속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0) 신간 안내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게시해 놓아야 한다.

11) 대출절차는 모든 사람이 질색할 정도로 복잡해야 한다.

12) 관외대출은 불가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몇 달이 걸려야 한다. 최선의 경우에도 이용객이 먼저 다른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13) 책을 훔치는 일이 가능하면 아주 손쉬워야 한다.

14) 개관시간은 근무시간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해야 하며, 따라서 은밀하게 노동조합이 동조해 주어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저녁과 오후의 휴식시간에는 하루도 걸르지 말고 문을 꽁꽁 닫아걸어야 한다. 모든 도서관의 가장 위험한 적은 고학생이며, 가장 좋은 친구는 자신의 개인도서관이 있기 때문에 공공도서관을 찾을 이유가 없으며, 죽은 후에 도서관을 남겨 놓은 돈 페란테와 같은 사람이다.

15) 도서관 안에서는 요기를 때운 다음 다시 원기를 회복하도록 해서는 안되며, 또 대출한 책을 모두 반환할 때까지는 카페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대출하기 위해서 도서관 밖에서 뭔가를 먹게 해서는 안된다.

16) 일단 대출한 책은 다음 날에는 찾아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17) 없는 책을 누가 빌려 갔는지를 확인할 수 없어야 한다.

18) 가능하면 화장실이 하나도 없도록 해야 한다.

19) 결국 이용자가 도서관에 발을 디딜 엄두도 못내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완강하게 1789년의 원리에 따라 만인에게 허용되었지만 아직도 집단적 의식 속에는 속속들이 배어 있지 않은 권리를 고집하여 도서관에 발을 디디더라도 열람실에서 잠깐 참조하는 것 말고는 단 한번도 결코 단 한순간도 서가에 접근하는 것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1981년

2001/07/08 Sun 11: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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