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인터뷰)
작 성 자:  lunamoth
작 성 일:  2003/08/10 Sun 22: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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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베르토 에코(인터뷰) 
 
  [조선일보] 1996-07-09 (문화) 좌담.대담 30면 4230자 
 
 
◎“30년내 유럽은 로마처럼 다인종사회 될것”/과거와 인연끊는 ‘철학의 미국화’ 걱정/기호학,사멸해야 승리… 인터넷은 과잉정보로 ‘정보부재’ 초래
□대담=김성도 고려대 교수
중세철학 미학 문학비평 대중문화연구 소설 미디어연구 건축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지적 영역을 개척해온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교수(64·이볼로냐대)가 국내언론사 중에서는 최초로 조선일보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조선일보사는 지난 6월29일부터 7월9일까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 스리지 국제문화센터에서 열린 에코의 사상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에 고려대 김성도교수(김성도·언어학)를 파견, 지난 2일 저녁 6시(현지시각) 회의에 참석한 에코교수와 80분간 대담을 갖고 21세기 변화의 양상과 문화변동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었다.〈편집자주〉
▲김=선생님을 소개할 때 따라붙는 직함은 에세이스트, 기호학자, 철학자, 문학비평가, 소설가 등 다양합니다. 하나만 선택한다면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에코=저는 제 자신을 철학자로 간주합니다.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기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제가 신문이나 대중적인 주간지에 글을 썼다는 사실은 저의 철학적 활동과 상반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작가나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은밀한 속내 이야기를 일기장에 정리했지만, 오늘날에는 TV나 언론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자신의 일기를 공적인 견해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김=선생님의 지적 편력은 체계적 연속성이 있는지, 아니면 철저한 단절인지 알고 싶습니다.
▲에코=일정한 흐름은 있습니다. 저는 먼저 미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연히 중세미학에서 시작했고 현대미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두가지 관심을 병행했습니다. 하나는 아방가르드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예술분야였습니다. 1950∼년대초까지 이 두가지 층위에 대해 동시에 연구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 두 분야는 전혀 관련이 없어보였습니다. TV, 만화 등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아방가르드예술가들과 조이스를 비롯해서 순수미학의 이론적인 문제들에 매달렸지요. 바로 이 시점에서 저는 기호학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두가지 양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삼았습니다.
▲김=이제 기호학 얘기를 해보지요. 다양한 이론과 방법, 경향 등의 이질성 때문에 현대 기호학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도대체 기호학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에코=역설적으로 저는 기호학이 소멸되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기호학의 죽음은 곧 기호학의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커뮤니케이션과 의미작용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지금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 즉, 가상세계에서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가상세계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 이상 대포알이나 탱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무기보다 체계적인 커뮤니케이션망을 갖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중심적인 문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기호학을 실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호학자로서 나의 소망은 1950∼년대에 구성된 기호학이 기존의 모든 분야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바람은 기호학이 죽는 것입니다. 즉 이 세계를 기호학적 관점에서 읽고, 모든 분야가 기호학의 관점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김=흔히 우리는 근대성의 완료와 거대담론의 종언으로 특징지워지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선생님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수용­해석합니까.
▲에코=니체는 『우리 세계는 역사에 대한 병을 앓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세기만해도 극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역사에 대해 모호한 개념만을 갖고 있었던 데 비해 니체 당시의 서양문화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역사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은 바로 이같은 난관을 넘어서기 위한 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철학의 미국화」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철학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소스라치게 저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참고문헌에서 1980년 이전의 문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그 전에 출간된 모든 연구업적, 철학의 역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반면 유럽은 물론, 제가 알기로 동양문화권에서는 현대문화와 과거문화의 연계성을 매우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포스트모던 논쟁은 우리가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는 주장에 기초하는데, 포스트모던 논쟁의 진원지인 미국문화는 포스트모던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인 프리모던(premodern)사회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사유전통과의 단절,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김=이런 맥락에서 현대문화의 위기에 대한 선생님의 진단을 듣고 싶습니다.
▲에코=5년전 저는 파리에서 작가, 철학자, 과학자 등이 참여한 보편문화 아카데미를 창립하고 헌장을 작성했는데, 제1조에서 도래할 2000년대의 문명은 온갖 문화가 뒤섞이는 완전한 문화적 잡종혼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유럽은 년안에 모든 인종이 어울려 사는 다양한 피부 빛깔의 대륙이 될 것입니다. 이 상황은 아프리카 출신의 황제가 있었고, 유태인들과 이집트인, 오리엔트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완전한 통합국가였던 고대 로마의 모습과 닮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뉴욕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국의 대통령은 백인이고 기독교 신자입니다. 유럽도 혼합문화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용의 기준을 마련해야 하며 학교에서는 단지 기독교 교리만이 아니라 이슬람과 불교에 대해서도 교육해야 하며 타문화를 수용하고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교육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아카데미에서는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문제를 다루는 교과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교과서에서 결코 평등이라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등이 신화인 이유는 자명합니다. 우리는 똑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현재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인터넷은 미국의 정보독점, 정보의 하부구조에 대한 미국화도 걱정되는 한편, 정보의 민주화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코=인터넷은 지구촌의 총체적 규범화와 획일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정반대로 다양성과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기에 인터넷의 진정한 문제는 정보과잉으로 인해 오히려 정보의 부재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책정보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했는데 해당 정보에 대해 무려 3천개의 「사이트」가 나오더군요. 결국 이같은 정보과잉은 실질적으로 꼭 필요한 정보를 얻는 일을 힘들게 만들지요.
▲김=그렇다면 책의 운명은 어떻습니까.
▲에코=제 호주머니에 있는 포켓판 책이 답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터넷도 TV도 책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책은 마치 우리가 식사할 때 사용하는 숟가락, 칼, 포크나 자전거와 같이 사람이 만든 창조물이고 손, 눈 등 우리 인간의 신체구조를 반영합니다. 수많은 영상문화의 화면이 범람해도 활자로 이루어진 한 페이지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물론 백과사전 제작자들은 이 문제를 걱정하겠지요. 가까운 날에 단 한장의 디스켓에 모든 백과사전 내용이 담겨질 테니까요. 그러나 시, 철학, 문학 등 책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는 영원히 책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김=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정리=김한수 기자〉
◎에코는 누구인가/기호학 대중화한 20C 철학자/「장미의 이름」등 소설도 인기
우리나라에서는 소설 「장미의 이름」이 인기를 끌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지성 움베르토 에코는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기호학을 대중화한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다. 특히 20세기초의 크로체 이후 이탈리아철학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를 좋아하는 국내독자들도 많다. 열린책들과 새물결 두 출판사에서 그의 책을 대부분 번역했다. 열린책들에서는 「장미의 이름」을 비롯해 「푸코의 진자」,「대중의 슈퍼맨」,「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등을 냈고 새물결에서도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철학의 위안」,「글쓰기의 유혹」등을 내 20종에 가까운 그의 다양한 작품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에코는 현재 전세계로부터 인터뷰와 강연요청이 쇄도하고 있다.<이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