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연한 헛것

2007/04/11 03:15

손을 뻗어 9층을 누르려던 아이의 한 손을 꼭 잡은 어머니는 나부끼는 벚꽃을 보며 눈을 떠올렸고, 조금씩 흩뿌리는 비를 걱정하며, 우산을 챙기러 집으로 돌아섰다. 나는 그저 비를 맞으며 발길을 옮겼다. 비는 곧 그치리라. 현재 내선 봉천역에서 사상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관계로 열차 정차하고 있습니다. 사상 사고가 수습되는 대로 출발할 예정이오니 안전한 객차 내에서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입구 옆 손잡이에 기대 반쯤 눈을 감고 평온의 늪에 빠져있을 때, 그 방송이 찾아왔다.

올해로 두 번째였으리라. 객차 내 모든 이들의 가슴 한켠을 휑하니 스쳐간 이름 모를 비보는 이내 무심한 기운 속에서 묻혀가는 듯했다. 마치 녹음이라도 된듯한 노련한 승무원분의 안내 방송이 여덟 번 정도 반복되고 승객이 어느 정도 들어찼을 때, 이윽고 문은 닫히고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역은 역삼, 역삼. 요 며칠 새 머릿속을 알 수 없는 무게감으로 짓누르고 있던 어느 블로그에 남겨진 유서를 떠올렸다. 무엇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언젠가 내가 썼던 경망스런 글로는 결코 마중할 수 없는 나직한 침묵이었다.

시계를 바라보았고, 발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고 낮게 깔린 회색빛 오후가 다가왔다. 운행 지연과 짧은 인사만으로는, 채워넣을 수 없는 빈자리가 너무나 커 보였다. 허나 알량한 채무의식 속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혼란의 귀퉁이를 찾아 지나간 이의 그림자를 쫓아가 보려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각기 떨어져 나온 꽃잎들처럼 그저 놓아주면 될 따름인데 나는 왜 손을 뻗어 그의 흔적을 붙잡으려 하는 것인가. 닿을 수 없는 그곳을 바라보며 다음 열차를 기다리다 잠이 들것이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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