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김영하, 『퀴즈쇼』, 문학동네, 2007, p. 70.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김영하의 장편소설 『퀴즈쇼』를 읽으며 그의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답변을 생각한다.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는" 세상에서, "틀리더라도 일단 자기 답을 준비해둬야" 할 테니. 이 노련한 작가 – 아니 이제 노회한 작가라고 해야 할까? 오래전 이명원님의 글과 우석훈님의 포스트(!)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 – 의 노련한 청춘 연가이자 순애보이자 성장소설이자 위로사인 소설을 숨 가쁘게 읽으며, 예의 "유사 연상의 잔치"와 콜라주의 습속에 사로잡힌다.
"저수지에서 건져" 낸듯한 "88만원 세대" 이민수 군의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을" 짧지 않은 연대기가 펼쳐진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부채를 떠안고 혼자가 된 채 고시원 쪽방과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고, 인터넷 퀴즈방에 몰입하다, "벽 속의 요정"과 귓속말을 나눈다. "오프라인" 퀴즈쇼에 나간 인연으로 "벽 속의 요정" 서지원과 정체불명 "회사"의 에이전트 이춘성을 만나게 되고, 그 와중에 고시원에서 만난 "옆방녀"와 "회사" 속에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벽 속의 요정
"빛이 나오고, 소리가 들려오고, 음악이 나오는, 세상을 엿보고, 세상도 나를 훔쳐보는 내 창"의 이야기를 다시금 만난다.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성장담과 연애소설" 로써 그들에 대한 헌사라는 작가의 말처럼, 구글과 위키피디어에서 검색하고 《무한도전》과 《소프라노스》 보고 MUSE를 듣는 이 시대 속의 그 "집단 무의식"의 생태를 그려낸다. "프리지아 한 다발을 들고 시티극장 앞에서"는 아니더라도, 그 시절 이후로 여전히 그들은 "베티를 만나러" 가고 있을 것이니.
"채팅을 하며 우리는 우리의 말과 사랑에 빠지고", "커플 미니홈피 같은 것을 만들어 아무도 기뻐해 주지 않는 둘 만의 승리를 즐"긴다. "서로의 영혼으로 떠나는 모험"속에서 "진심으로 이해받기를 원하는"이와 "완벽하게 자기를 이해해줄 사람을 찾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애정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이의 만남. 어쩌면 SF 소설 얘기처럼 "영원히 만나지 못하지만, 오래전에 보낸 메시지는 계속 도착"하고 있을지 모른다. "세상엔 처음 만나 영원히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민수와 지원. "잘될 거야. 다 잘될 거야"라며 '나'를 다독이지만 해설의 말처럼 "휘발될 기쁨과 날카로운 고통"의 여운이 낮게 깔린다. 아마도 그 지점에 옆방녀의 현실이 위치할 것이다.
흰개미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소수독과점의 경제구조, 양극화 현상, 비정규직의 전면화 등 '삶의 자본화', 또는 '삶의 생존 전략화'라고 총칭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젊음의 고단한 세상살이"와 "신빈곤계급에 대한 도시생태학"으로 명징하게 정리되는 순간, 또 박제하는 순간 어쩌면 '나'처럼 "명백히 자살의 예감을 풍기며 허망한 눈빛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을 그대로 놓아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세계"로 돌아와서 "돌아갈 곳 없는 싸구려 용병"의 삶을 사는 고시원 옆방녀와 "직장, 집, 부모, 미래에 대한 확신 같은 것들"이 결여된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닌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이자 "글로벌 경제 시대"에 "국제 경제력이 떨어지는" "가난한 이십 대 후반의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언젠가 떠나게 되고 완전히 잊어버릴 그 정거장 같은" 어느 "고시원 옥상에서 삼겹살을 먹"으며 저 자신을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말을 사줄 남자"도 아닌 "말을 들어주지 못한" '나'는 뒤늦게서야 자신을 알게 된다. "나는 옆방녀의 옆방에 살던 남자"라는 것을. 그럼에…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제의 책, 오늘의 나
"몸을 바꿔야 해" "회사"에서 '유리'는 '나'에게 퀴즈쇼를 위한 선험조건을 얘기한다. 《오픈 유어 아이즈 Abre los ojos》 의 자각몽과 가상현실, 「피뢰침」 속 동호회, 그리고 스타리그가 겹쳐 보이는 '회사'를 지나오고 '나'는 다시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한다. "반복되는 건 없는 일회용 같은 인생"이라 생각하던 신념을 복기하며 나름의 답을 찾아가게 된다.
"일간지 경제면 같은 세계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기만의 벽장을 가진 사람"으로 "내가 정말 사랑했던 것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길" 원했던 꿈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으며", "한 번도 입 밖에 내서 말해본 적"은 없던 '나'는 '회사'에서 배운 한 가지를 지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세상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다는 거. 인간은 변하지 않고 문제는 반복되고 세상은 똑같다는 거야."
우린 기대에 대한 피로감에 대한 변명을 해보곤 하지만, "유독한 희망 대신 달콤한 무위로의 도피"가 답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 퀴즈쇼가 건네는 애절한 동질감도, 통렬한 현실도, 절실한 질문도, 자연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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