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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동물원  [길 위의 이야기]

입구에 있는 외환은행 앞에서 왼쪽으로 돌면 선물가게, 화장품 가게들이 즐비하게 나오고 TGI 앞에서 한번 더 길을 꺾으면 현대백화점 지하 출입문을 등진 채 지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렇게 가면 시간이 약간 더 걸리지만 여자는 그렇게 가기를 즐겼다. 쇼핑몰은 동물원 같아서 매일 지나가도 별로 질리지 않았다. 어쨌든 사무실에 도착하면 9시 20분이 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는 별로 크지 않다. 아니 새로운 것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 게으름과 익숙한 것만을 추종하려는 안일함의 합작품일 것이다. 늘 그렇게 유리동물원으로 향한다. 그 주말 속으로 쏟아져나온 인파 속에서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속엔 한데 어우러진 사연들이 저마다 숨 쉬며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외박을 나온 듯한 생도의 모습에서 기묘한 잔상들이 출몰하기도 하고 컴퓨터 잡지를 고르는 한 선사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모두를 한곳에 진열한 채로 또 모두를 불러들인다. 더 이상 들어갈 이유도 나아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단지 블랙홀처럼 끊임없이 빨아들이며, 맞춰진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도 그 앞에서는 토를 달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강압적인 미소속으로 조금씩 길들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속에서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옷과 책을 사고 스탠디(standee) 앞에선 짐짓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플래시를 터트리면 그만이다.

오늘도 늘 지나치기만 하는 수족관 근방에서 자기부상이라도 하는 듯한 강아지 풍선을 본 것 같다.

남자는 코엑스 몰 광장 앞에 앉아서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저 쇼핑몰이 거대한 유리 동물원 같지 않냐고 했었다.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지금 아바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 몸을 싣고 있을지도 모르다. 어쩌면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비구니들이 사는 남도의 암자에서 자기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이 도시 어딘가에서 여전히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정말 모자에서 토끼가 나오는 마술을 열심히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진심으로 그것을 기원했다.

남자는 기다리는 데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광장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 남자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꼬리.

2004/12/27 01:52 2004/12/27 01:52



Posted by lunamoth on 2004/12/27 01:52
(0) trackbacks |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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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웬지 읽어보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유리 동물원이라.. 커플 사진 찍어달라 부탁 받을때 참 염장질이죠 ㅋ;

    와니 2004/12/27 04:42 r x
    와니님 // 예 괜찮습니다. 일전에 봐왔던 작가들과는 다른 특색이 있고요. (아직도 다 못 읽긴 했습니다만;;) / 정말로 허탈한 미소와 함께 심한 좌절모드로 빠져들었죠...TT

    lunamoth 2004/12/27 23:33 r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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