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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준,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중에서  [나의 서재]


 ……그리고 인영씨. 인도 사람들은 무척 가난합니다. 게다가 그 가난은 전혀 가망 없어 보이구요. 하지만 이유 있는 가난입니다. 성스러운 게으름입니다. 그들은 그저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된 내세가 존재하리란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견디기 때문이죠.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거리에 사람이 많습니다. 엄청난 인구라서기보다는, 이네들은 본시 집 밖에서의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길의 의미를 알고 있는거죠.

 드넓은 땅덩어리에, 유구한 인류 문명의 진원지, 인간보다는 소를 더 신성시 여기고, 아직도 중세와 고대가 공존하며, 카스트 제도를 아무런 불만 없이 지켜나가는 민족. 나는 이들의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 속에서, 신비스럽다는 말을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갠지스 강은 몸을 씻고 예배드리는 사람들로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립니다. 한쪽에서는 죽은 자를 태워, 그 재를 강가로 흘려보내고 있구요. 사자(死者)의 허망함을 비누 삼아, 더러운 육신과 영혼을 정갈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죽어서 무엇이 되는 걸까요? 이 불결하기 그지없고 비합리로 가득 찬 대륙은, 한번도 그런 심오한 의문에 사로잡혀보지 못했던 나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머리가 한 틈새씩 서서히 벌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갠지스 강이 흐르는 바라나시에서 북동쪽으로 불과 9Km 떨어진 곳에는,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을 했다는 사르나트가 있습니다. 큰 가로수 사이로 우뚝 서 있는 다메크 대탑(大塔)이 웅장한 자태로 신자들을 맞이합니다. 스물여덟 개의 크고 작은 사원들은 보리수가 울창한 가운데 적갈색으로 눈부십니다. 혜초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더군요. 그리고 부다가야. 샤카족의 왕조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인생의 고뇌를 통감하고 보리수 아래서 해탈한 곳이 바로 부다가야입니다. 부처님이 앉아 있던 단(壇) 주위는 순례자들이 고행길에서 가져온 꽃들로 만발합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얼굴과 다른 언어로 탑돌이를 합니다. 소원을 빌면서요.

 한동안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곧 팔아야 했죠. 외국인, 특히 여자 외국인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인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나를 향해 악의 없는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뭔 줄 아세요? 사막에서 자전거를 타고 싶습니다. 불가능한 일이겠죠.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달빛 속으로라도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우리 고달픈 윤회의 끈은 언제나 풀어질까요. 이런 욕심마저 버리기 위해 걷고 또 걸어야 하겠죠. 내 시(詩)의 치부는, 그런 꿈의 가면을 쓰고 썩어 갔던 것이 아닐까요.

 인영씨의 지금이 그러하듯, 나도 내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는 떠돌고 있고, 인영씨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거겠지요. 한낱 육체의 일이지만요.

 우리는 서로의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더랬습니다. 나는 인영씨의 느닷없는 절필낙향(絶筆落鄕)을 납득할 수 없었고, 인영씬 이 위험천만하고 기약 없는 먼지투성이 여행에 분노했지요. 그것이 우리 사랑의 결별이었다 해도, 나 지금 후회하지 않습니다. 떠난지 석 달이 다 되어가는 이제야 비로소, 예전에 결코 깨닫지 못했던 인영씨의 어둠과 고독이, 인화되기 직전의 사진처럼 가물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더 지난다 해서, 내가 그걸 완벽히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장담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어요.

 가끔, 어쩌면 자주, 인영씨와 함께했던 날들을 떠올립니다. 참 잘해주었죠. 뒤늦게라도 이렇게 감사드립니다. 우리 둘이 나누었던 이야기와, 또 때론 서로를 할퀴었던 애증의 열정이, 아주 곱고 영롱한 추억의 사리로 남게 해달라고, 나는 탑을 돌며 누군가를 향해 빌었습니다.

 이렇게 긴 편지를, 느닷없이, 좀 복잡한 과정을 통해 보내는 것은, 다만 당분간이라 하더라도, 혹은 영원히라도, 우리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헤어졌던 까닭입니다.

 그곳의 생활은 아름다운지요? 어떤 결론에 이르든지, 인영씨가 삶을 좀더 존중하게 되었던 한 시절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타지마할을 알고 있겠죠? 새파란 하늘 높이 솟은 흰색 돔 Dome, 숨이 막힐 정도로 화려한 대리석, 색색의 보석들. 샤 자한 황제가 죽은 왕비를 위해 지은, 지구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무덤을요. 축조하는 데만도 무려 22년이 걸렸다는군요. 그 사랑의 힘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날이 저물고 뜨겁던 태양이 아그라 성 너머로 기울어갈 즈음, 달빛에 비친 타지마할은 장관이라 들었습니다.

 내일,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의미를 찾아 타지마할로 갈 것입니다.

 어느날, 길에서, 당신의 친구, 지원.

—-

 나는 지금 무인도에 표류해 있다. 배가 사고를 만난 것은 분명 동해 바다 위에서였는데, 이곳의 풍경은 언젠가 엽서에서 보았던 하와이 같다. 여객선에선, 좀 수다가 심한 편이긴해도 미모가 뛰어난 여자와, 칵테일을 스무 잔이나 마셨더랬다. 이혼 기념 여행을 하는 중이라던 그 여자는, 자기 나이가 나보다도 어리다며 노골적으로 유혹했다. 뭔가 미심쩍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백을 열고 주민등록증을 훔쳐보니, 이런,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여장 남자(女裝男子)였다! 염려해줄 필요는 없다. 곧 배가 뒤집혔으니까. 그 다음 상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녀, 아니 그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어디에서든 살아 있다면 좋겠다. 진심이다. 그리고, 동성이건 이성이건 간에, 착한 짝을 만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왜냐고? 한없이 외로워 보였으니까. 이유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 섬이 참 마음에 든다. 하얗고 영리한 개 한 마리와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고 있는데, 아침이면 녀석과 함께 해안선을 따라 섬 전체를 한바퀴씩 돈다. 배가 고프면 여기저기 주렁주렁 달린 열매를 따먹고, 밤엔 이불 따위가 없어도 따듯하기만 하다. 평생 이렇게 지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종일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시를 쓴다. 모두 너를 위한 사랑의 노래들이야. 네가 쓰곤 하던 그런 어려운 것들과는 차원이 아주 다르다. 만약 내가 도시로 다시 돌아가 출판한다면 틀림없이 베스트셀러가 될 테지만, 이 아름다운 섬은 일체의 욕심을 허무하게 만든다.

 루마니아 공산 치하의 혹독한 감옥에서, 리처드 범브란트라는 목사가 천여 편의 시를 지어 외웠다고 언젠가 네게 얘기해준 일 있지? 나도 잠들기 직전에, 내가 쓴 시들을 모두 외우고는 흙먼지로 덮어 지워버린다. 그러면, 마치 내가 한 권의 시집(詩集)이 된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가끔은 이런 생각에도 잠겨본다. 만일 내게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 종이와 펜이 있다면, 내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써넣어 바다로 던지고 싶다는, 그런다면, 인도의 강가에서 네가 목말라 그 작은 손으로 물을 떠마실 때, 건져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난 깨닫는다. 예전에 내가 너더러 사랑한다고 했던 모든 고백들이 거짓이었다는 걸. 그래서 지금 진짜로 고백하고자 한다. 널 사랑한다. 모든 세월에 밤이 있는 것처럼, 지난날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너는 거기서 승려가 될 것 같은 편지를 보내왔지만, 해탈이란 말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슬프게 들리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 황당한 진실은 애초부터 없는 거란 말이다. 그러니 너도 표류하길 바란다. 그래서 내게로 오렴 와서, 날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두고두고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손때가 묻도록 읽어다오.

 너의 자전거를 힘차게 밀어주고 싶다. 바다와 산이 있는, 오래전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던, 달의 뒤편으로.

 어느날, 섬에서, 널 사랑하는, 인영.

이응준,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중에서
2014/01/07 23:18 2014/01/0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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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moth on 2014/01/0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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