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Light (L’Empire des lumières), 1953–54. René Magritte.
2006.08.21 PM 9:36 해산물과는 일면식도 없이 바다이야기가 끝나고 얼마후 참여정부 들어 첫 "직파 간첩"의 검거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열하루를 끌어왔던『빛의 제국』의 여남은 페이지를 마저 읽었다. 현실 속 노동당 35호실 공작원 정아무개는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되었고, 소설 속 130연락소 출신 김기영은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작가의 말조차 없이 24 를 연상케 하는 디지털 시계로 된 목차 속에는 단 하루가 주어진 남자의 일상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아니 한 남자의 예전과 다른 일상이, 일생과 함께, 그 주변의 모든 이들의 점묘화와 함께 그려지고 있었다.
평범한 영화수입업자 기영, 수입차 딜러 마리, 바둑 소녀 현미와 친구 아영, 대동 TNC 소속 박철수, 포르노 중독 영화사 직원 위성곤, 국어 교사 소지현, 철이와 늘 함께 사는 진국, 이상혁 라인의 130연락소 동기 정훈, 마리의 정부 법대생 성욱, 별도의 라인이었던 이필 동무, 두더지 (mole) 북극성, 오타쿠 태수, 쓰리썸의 일원 판다, 회색조끼 정팀장이 씨실과 날실로 엮여져 잠복하고 미행하며, 첩보하고 회유한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세세한 감상을 제대로 쓴다는 것은 바다이야기에서 고래 세 마리가 나올 확률 정도로 무리일 테고, 거기다 나름대로 술술 "읽히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내게, 김영하의 고언이 다가와 발목을 잡았다.
"이 소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다. 아니 있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지워나간다. 마치 에셔의 판화 같은 구석이 있다.『검은 꽃』을 쓸 당시 나는 이런 고민을 했었다, 과연 인간들이 먼 곳에서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완전히 잊혀진다는 것, 그 허무함을 지문이나 대사로서가 아닌, 형식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까?『검은 꽃』은 1부가 2부보다, 2부가 3부보다 짧다. 특히 3부는 극단적으로 짧다. 그런 기우뚱함, 불균형, 뭔가 더 얘기되어야 할 것들이 되지 않은 듯한 느낌은 어떤 면에서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빛의 제국』역시 주인공의 의도와 의지, 그의 소통은 보이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 즉 주인공이 의식할 수 없는, 그에게는 4차원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의 외부에 위치한 소설의 구성과 형식을 통해 서서히 허물어져 나간다. 소설적 현대성에 대한 이런 지향이 제대로 실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소설을 읽음에 있어 <이야기>에만 집중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바람이다. 물론 이 소설은 <잘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 김영하「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작가세계 2006년 가을호
독자의 알권리와 카프카, 그리고 B급 영화 by 김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