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기억합니다. 더 부연할 것도 없이 진부한, 누구나 갖고 있을 그런 개인적인 삽화와도 같은 얘기입니다. 세상의 끝에 서서 끝없이 내리는 눈을 홀로 맞으며 눈물이 내리던 순간. 언젠가 그 얘기를 언급하기도 했었지요. 그 순간 생각난건 처음으로 눈을 품어보게 된 때 였습니다. 누구도 범하지 않은 순백의 결정 위에서 한없이 쏟아지는 눈을 마주하며 그때까지 질러보지 않았던 일성을 내뱉어 봤던 풍경이었습니다. 그 순간 "세상의 중심"은 바로 차디찬 등결속으로 스며드는 눈밭의 안온함을 느끼는 제 자신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모든 비밀을 다 품어내는 것만 같은. 처음으로 눈을 느끼고, 호흡한 때를 기억합니다.
스밀라가 읽어내는 눈은 정밀한 세계속을 현미경으로 들어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누구도 못할 타고난 감각으로 그 속에 내재된 의미와 숨겨진 배후를 파고드는 발걸음은 한없이 빠져들어 매혹되는 눈의 마력과 닮아 있는듯 했습니다. 누구나 흘려 지나치게 되는 눈을 가슴속에 담아 더 없는 애정으로 품어내는 순백의 감정 역시 부럽게 바라볼 뿐입니다.
작은 결정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결빙하며 빙산과 빙하를 이루는 순간 처럼 이야기는 범위를 확대해 생각 못한 극점을 향해 다다릅니다. 그 사건의 귀결과 일련의 과정들이 그리 무상하진 않습니다. 점차 알게되어 가는 한 여인 아니 한 인간의 성장과 성취에 그리고 깊은 내면에 매료되어 그 뒤를 따르는 그림자가 되어버리니까요. 눈과 얼음과 매서운 추위의 배경속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순수한 열정이 이 소설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는것만 같았습니다.
"끝없이 방향을 바꿔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 여정이 눈을 끌어안고 세상에 맞서 한바탕 호기를 부려보고 싶어 하던 때를 생각나게 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다만 눈을 맞으며 눈속을 걸어냈던 때가 떠올라서 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은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경이의 순간입니다. 사위를 차갑게 식게 한 뒤 가슴속을 타오르게 만듭니다. 스밀라가 그러했듯이.
스밀라를 기억합니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을, 누구도 가서 닿지 못할 그 차고도, 따뜻한 어떤 이의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