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열두 시 십 분부터 한 시 십 분까지 공중파 채널을 켜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텔레비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시각 텔레비전은 작심한 듯 자신의 치부까지 들춘다. 이 프로그램의 이런 장면은 너무 선정적이었다. 저 프로그램의 저런 장면은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텔레비전의 용기에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내며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찬찬히 본다. 지난 일주일 동안 방영되었던 가장 선정적이고 가장 폭력적인 장면들을. 수많은 프로그램들 중에서 엄선된 장면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왜 하필 이 시간일까.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시간대에 방영한다면 더욱 존경과 찬탄을 받을 텐데. 게다가 왜 동시에 고해를 하는 것일까. 서로 다른 시간에 방영한다면 각 방송사들이 엄선한 지난 한 주의 가장 선정적이고 가장 폭력적인 장면들을 볼 수 있을텐데. 하긴. 제아무리 용기 있는 텔레비전이라도 보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들추고 싶지는 않겠지. 고해성사는 본디 고백을 들어주는 사람 하나면 족하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병원이나 성당 같은 곳에는 누군가와 함께 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텔레비전이 지나 한 주일 동안 저지른 악행의 목록을 고해하는 동안 나는 신부처럼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기만 하면 된다. 고해가 끝나면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래도 광고주들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참! 시청자들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via]
마린블루스 200305017